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다 미츠나리 (문단 편집) === 최후 ===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자 미츠나리는 재기하고자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다나카 요시마사]]에게 붙잡혀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끌려왔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의 비참한 모습을 로쿠조가와라[* 이 장소는 현재의 교토 외곽인데 일본 전국에서 참수집행 장소로서 매우 유명했다.]의 성문 앞에 세워두고 모두가 구경하게 했다고 한다. 처형이 결정된 다른 제장들이 그냥 갇혀있기만 했던 반면, 미츠나리에 대해서는 동군 지휘관들의 사적인 원한도 컸는지[* 원래 미츠나리가 하던 일이 숨긴 고쿠다카를 찾아내거나 임진왜란 때 공을 부풀린 것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원한을 살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지나가며 모두 비웃고 욕을 하고 [[침]]을 뱉거나 심지어는 [[육모방망이]]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지만 미츠나리는 끝까지 의연했다고 한다. 그 뒤 사형이 결정되어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직전에 목이 말라 간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으나 "물은 없지만, 홍시는 있다. 대신 이걸 먹어라."라며 때마침 가을이라 잘 익은 [[홍시]]를 건네자 몸에 해롭다며 먹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진 간수가 "곧 죽을 놈이 몸을 아껴서 뭐하겠소?"라며 비웃자, 미츠나리는 ''큰 뜻을 품은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아끼는 법이다.''[* 해석이 분분한 말이지만 큰 뜻을 품었으면 최후에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된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 설마 처형되기 직전까지도 자신을 도울 누군가가 있다고 믿었을까... ]라고 한 뒤 처형되었다.[* 일본어 위키: 三成が処刑直前に喉が乾いたので警護の者に水を所望した際、「水は無いが、柿がある。代わりにそれを食せ」と言われたのに対し、三成は「柿は痰の毒であるのでいらない」と答えた。これを聞いた警護の者は「もうすぐに首を切られる者が、今から毒断ちをして何になる」と笑ったが、三成は「大志を持つ者は、最期の瞬間まで命を惜しむものだ」と言い、泰然としていたという] 1600년 10월 1일(양력 11월 6일), 이때 공식적으로 처형된 다이묘는 3명. 다만 이후 [[가이에키]][* [[쵸소카베 모리치카]],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 단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나중에 복권되어 10만 석의 [[고쿠다카]]가 새로 생겼으며 이후 [[시마바라의 난]]에서 엄청난 용맹을 과시했다.] 및 [[할복]], [[유배]][* [[우키타 히데이에]], [[사나다 마사유키]] 등] 등으로 쫓겨나거나 살해가 거의 확실시되는 죽음을 맞은 다이묘는 굉장히 많았으며, 대규모로 양산된 [[로닌]]들이 이후 [[오사카 성 전투]]에서 도요토미가의 편에 섰고,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이 [[시마바라의 난]]을 비롯 이후 막부 기간 내내 벌어지는 [[잇키|민란]]에 가담하여 막부의 골칫거리가 된다. 원래 일본의 전국시대의 암묵적 규칙에 의하면 명목상이든 실질적이든 간에 패배한 세력의 총사령관은 [[할복]]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즉 [[모리 데루모토]]도 할복 또는 참수당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비록 영지를 거의 몰수에 가까운 대폭 삭감을 단행하였으나 목숨은 살려줬고,[* 하지만 이 처벌을 누군가는 받아야만 하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실제로 모리 데루모토에게 서군으로 붙으라고 권유한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대신 처벌하면서 "순진한 데루모토를 이 [[땡추]]가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데루모토 대신 에케이를 참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경우도 처음부터 적극 가담하지 않은 점, 그리고 가문을 이끌고 나선 게 아니라 직속 병력만 데리고 참전한 점 등을 고려해 일선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처리를 마무리했다.[* 요시히로가 관대한 처벌을 받은 것에는 퇴각 과정에서 적진을 역돌파하는 기행을 벌이며 엄청난 위용을 보여준 탓도 있다. [[시마즈의 퇴각]] 참조.] 하지만 모리는 애초에 본인은 오사카 성에 머물고 직접적인 지휘를 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게 참작된 것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위협이 된다 싶은 다이묘들은 사형을 면치 못했다. 미츠나리 말고도 [[고니시 유키나가]] 또한 적극 참전한 죄가 있다 하여 같이 참수된 것이 그 증거다.[* 다만 [[소 요시토시]]는 '''[[사면|패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형벌도 안 받았는데]]''', 이쪽도 주도적으로 참전한 건 아니라 참작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과 교역해 왔던 것을 이용해 [[임진왜란]]을 용서하고 국교를 재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라는 역할을 맡겨야 해서 넘어가준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모든 화의 근원이라 당연히 처형을 면치 못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할복하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유를 자살을 금하는 천주교 교리상의 이유로 끝내 거절하여 처형당했다. [[할복]]과 사형(참수)에는 사후 엄청난 대접의 차이가 있었고, 고니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천주교에서 자살은 금기 사항이며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스스로 죽지 않고 법의 형벌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참수당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후 천주교 탄압 과정에서 신자들 대부분이 순교했는데 이들 가운데 자결을 택한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았고 대부분 사형을 받아들였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인데 '''[[야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모리 데루모토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 본보기로 참수했다. 안코쿠지 에케이를 참수한 그 행동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다음에는 당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경고였다. 시마즈와 모리의 전후 외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야 시마즈가 위협적인 활약을 했지만 시마즈는 겨우 1600명, 모리는 2만 명을 넘는 대군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시마즈가 서군에 붙은 것도, 원래 동군에 참가하려다 지각해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